1988년 3월 10일, 영등포 일대의 용접, 제관, 배관 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서울건설일용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최초의 건설노동자의 노동조합이었다.
전국건설노동조합 백석근 위원장은 이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도시개발로 인한 철거가 대규모로 벌어질 무렵 백석근 위원장은 대규모 철거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빈민촌에 있었다. 대규모 철거로 인해 빈민문제가 사회문제로 제기되던 당시, 빈민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백 위원장은 철거집단 내에서 다수가 건설 일용노동자란 것을 인식했다.
이들과 업종모임을 가지면서 소위 ‘노가다’로 불리는 건설노동자들의 작은 모임에서부터 건설노조로 발전하기까지의 매 순간순간, 백 위원장은 건설노동자와 함께였다.
초창기 건설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시도 한눈 팔지 않고 건설노동자들과 함께였다.
노동조합이 처음 결성되던 당시를 기준으로는 20년, 빈민운동을 하던 시절까지 합치면 25년 가량을 건설노동자와 나란히 해온 백석근 위원장은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건설노동자의 조직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갔다.
발에 불이 나게 현장을 돌아다니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노동조합과 함께 투쟁하자고 얘기하던 그의 열정의 비결은 따로 있었다.
“조직을 이해한다는 것은 조직구성원인 사람들의 희망을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인내와 집중으로 함께 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건설노동자들의 모임들이 노동조합의 형태를 띠고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후반.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한 산업설비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노동조합은 플랜트노조의 시초가 되고, 대도시 토목건축현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건설노조의 시초가 됐다. 또 인력시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은 지역노조로 발전하게 된다.
1990년대 초 플랜트노조는 전국 7개 조직에서 2개 조직으로 줄어들고, 건설노조는 서울, 성남, 인천 조직만 남게 된다.
조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100명이 가입하면 80명이 탈퇴하는 등 조직사업에 열을 올렸지만 성과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사무실 지키기 운동이었다. 건설일용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사무실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때도 있었다는 생각으로 노동조합을 지켰다”
조직 확대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무렵 백석근 위원장은 건설현장 구조의 모순에 눈을 돌렸다. ‘다단계 하도급을 깨야 조직이 된다’는 인식으로 제도개선 투쟁에 집중했다.
이후 IMF 태풍을 거치며 실업대책투쟁과 굵직한 투쟁은 계속됐다. 타워크레인 총파업, 대구, 울산, 포항 총파업 등 굵직한 투쟁을 통과하며 만난 조합원들과의 시간은 아직도 건설노조의 수장인 그에게 가슴 뜨끈하고, 뻐근한 순간이다.
건설산업은 수주생산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업은 인력수급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건설현장 인력을 소위 ‘프로젝트 계약직’이라는 고용형태로 운용한다. 또 “비정규직의 모든 형태를 총망라하고 있다”고까지 얘기하는 건설노동자들의 불안한 고용형태는 건설산업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 극대화된다.
건설현장의 이런 특징 때문에 현장은 인맥으로 얽혀져 있다. 인력시장 등의 간헐적인 노동시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그룹이나 팀 단위로 고용계약을 맺고 일자리를 유지한다.
팀 내의 인간관계는 ‘형님’, ‘동생’ 하는 사적인 유대관계에서부터 고용-피고용관계에 있는 계약관계까지 복잡한 양상으로 얽혀져 있다. 이 속에서 근로조건이 통제되고, 고용과 복지가 걸려있는 셈이다.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를 조직한다는 것은 이들 팀을 배제하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 위원장은 “일과 인맥을 조직 내로 가지고 와서 현장 중심의 조직으로 가져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건설현장의 팀을 끌어안고, 이들 팀을 공식화하고 집단적 노사관계로 전환해야 한다”면서 “건설노동자의 노동조합은 일자리, 즉 노동시장을 노동조합이 통제하는 과정으로 봐도 된다”고 덧붙였다.
노동조합은 언제 일자리가 없어지고, 생기는지를 미리 파악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고, 지역과 일자리의 고리를 연결하는 것도 노동조합의 역할이었다. 이처럼 복잡한 인력수급구조와 현장 내에서의 다양한 갈등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현장을 ‘아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현장에서는 기능을 모르면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개월 기능을 따로 배우기도 했다”는 백 위원장의 말 속에서 현장에 대한 열정이 묻어났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백 위원장은 다양한 인간관계로 얽혀져 있는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현장 내에서는 모두가 같다’는 점을 강조했다.
현장 내 다양한 갈등이 일어날 수 있지만, 결국 같은 현장에서 일한다면 목표지향은 같다는 것을 제시해야 조합원은 노동조합 주위로 모였다.
최근 8년 동안 건설노조에는 굵직한 투쟁들이 연이었다. 백 위원장은 대구에서, 울산에서 투쟁했던 순간순간이 소중하지만 ‘이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할 만한 사건은 없다고 말했다.
대신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이라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예전 서울건설지부의 사무국장이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고, 벽돌 쌓는 일을 했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좋은 일을 하는데 꼭 힘을 보태고 싶다며 노동조합 사무국장을 자청했다”면서 “지금은 노동조합에 있지 않지만 그때의 사무국장의 열심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회상했다.
숱한 구속자를 낳기도 한 건설노조의 역사 속에서 그에게는 ‘사람’이 곧 참고서였다.
그는 ‘학습하자’, ‘ 나로부터 결사하고 실천하자’, ‘뿌린 대로 거둔다’ , ‘수고하는 동지에게 감사하자’는 네 가지 원칙을 강조하는데, 이 중에서도 ‘학습’에 한 번 더 강조점을 찍는다.
“학습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못한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면서 또 한 번 배우게 된다.”
백 위원장은 “노동운동의 중심에는 사람과 조직이 있어야 한다” 면서 “개인과 조직이 얼마나 조화롭게 엮여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은 곧 인간관계이다. 인간관계는 신뢰이자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신뢰는 처음에는 사적인 친분에서 시작하지만 사적인 친분이 축적되고 함께 실천하면서 더 발전적인 관계로 옮아간다”고 덧붙였다.
건설노조의 총파업이 현장투쟁으로 중심이동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총파업이 마무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투쟁 중인 현장이 남아있다. 총파업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지만 백 위원장은 건설노조의 위원장으로서 아쉬운 점을 조금 털어놓았다.
“이번 총파업의 주요쟁점은 건설기계 장비들의 유가문제와 여기에 연결되어 있던 물가인상 문제였다. 표준임대차계약서를 정식화하자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동시간 문제 등 건설기계노동자 뿐 아니라 전체 건설노동자들이 함께 싸울 수 있는 쟁점을 만들어나갔다면 더욱 확산할 수 있는 투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백 위원장은 총파업 과정에서 정확한 현실인식과 정세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고 전했다. 정확한 현실인식을 근거가 현장중심의 조직적 결의를 만들어내고 파업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백 위원장은 현재 노동운동에서 필요한 리더십에 대해 “노동운동의 정파문제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 평가가 있는 것은 정파 자체가 아니라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있어서이다.
관성에 의해 운동을 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현장의 의식도 달라지고, 요구도 다른데 과거의 현실인식으로 운동을 하려고 하니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것”이라면서 “관계를 중시하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통구조를 원활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원활한 소통구조를 만들고, 미래지향적인 상을 조합원들에게 제시하기 위한 길에는 왕도가 없다. 관성이 아닌 학습하면서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며 조심스럽게 노동운동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건설노조, 산별교섭의 미래 꿈꾼다
건설노조는 통합 산별노조 완성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총 3단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될 전국 건설노동자의 단일산별노조 완성사업은 현재 2단계를 진행중이다. 업종별 체계를 단일노조로 모으고 분과위로 체계로 전환하고 각 권역별로 지역본부를 구성했다. 지역단위 노조는 지부로 전환하고 지부는 유지된다.
현재 진행 중인 2단계 사업은 토목건축 현장의 조직사업을 확대하고, 플랜트 조직과 전기 직종의 지역적 확대, 건설기계 업종 확대 강화, 지역본부 산하 지부의 재편 등을 통해 지역본부 단위에서도 각 업종을 관장할 수 있도록 해 통합 단일노조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다.
마지막 최종 단계가 단일 산별노조로 산별교섭을 하는 것이다.
백석근 위원장은 “건설자본이 통합적 시스템으로 현장을 관리하듯이 노동자들도 하나의 시스템으로 대응해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강한 신념을 드러낸다.
백석근 위원장은 건설노조의 단일 산별교섭을 2년 후면 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했다.
20년전부터 지금까지 차근차근 밟아 올라와 새로운 관문으로 가는 새로운 문이 보이기 시작한 셈이다. 그가 지금까지 건설노동자들과 쌓아온 단단한 시간만큼 앞으로 기틀을 만들어갈 건설노조의 새로운 발전을 기대해본다.
‘리더십 매뉴얼’은 인터뷰 진행 후, 인터뷰 참여자의 리더십 스타일을 진단할 수 있는 구조화된 질문지를 직접 작성하도록 하여 여과없이 게재하는 코너입니다.
이 매뉴얼은 매번 인터뷰 때마다 동일한 질문으로 진행됩니다.
<전국건설노동조합 백석근 위원장의 리더십 매뉴얼>
• 리더로서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자신의 행동을 다스려야 하는가?
리더는 자기가 속한 조직을 가장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조직을 이해한다는 것은 조직의 구성원인 사람들의 희망을 제대로 보는 것이라 봅니다.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인내와 집중으로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 어떻게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는가?
모범이란 이미 예전부터 나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모범이 되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할 때만이 의미가 있지요. 이는 상호의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 전망이 불투명할 때, 어떻게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
미래의 비전은 희망을 말합니다.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것은 어쩌면 당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제시하고 실천의지를 갖는다면 주위사람들은 당장의 어려움을 뒤로 하고 기꺼이 함께 할 것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 다른 사람들을 공통의 목표로 이끄는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귀를 기울이고 역지사지의 역량을 끊임없이 길러간다면 그리고 조직 내 소통을 위한 인적자원을 최대로 존중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 붙이자면 조직마다 특성이 다릅니다. 특성에 맞는 조직체계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도 한 몫하겠지요.
• 응집력이 있고 사기가 넘치는 집행부를 만드는 능력은?
조직을 운영하는 모든 사람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그만큼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것에 왕도는 없습니다.
조직의 리더들의 올바른 생각과 솔선수범일 것입니다. 또한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여 각자의 사업이 조직의 큰 틀에서 하나이면서 전체로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 있다면 단단한 집행부가 될 것이라 봅니다.
• 권한과 정보를 분산시키고도, 리더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
조직 내에 적정한 힘의 균형은 조직의 건강성을 담보합니다. 조직의 건강은 곧바로 지도집행력과 직결됩니다. 전국건설노조만 보더라도 다양한 업종과 지역이 있습니다.
특성에 따른 권한과 정보의 분산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필연은 억지로 집중시키려하는 것은 어쩌면 많은 부작용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필연 또한 집중되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조직이 무엇인가 결정하기 위해서 정보의 총체적 집중을 요구했을 때입니다. 곧 조직의 확대강화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는 것이고, 가면서 구심력이 커지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 어떻게 하면, 일에 활기와 열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가?
미래에 대한 전망입니다. 전망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의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곧 사람의 의지물이 모여 조직의 큰 대의가 되고 결국 그 대의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사업이 일입니다. 일에 활기와 열기가 있기 위해서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구성원들의 확신입니다.
• 다른 사람(조합원/집행부)을 이끄는 데 필요한 자신감은 어디서 얻는가?
나 자신이 세운 뜻에 동의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자신감입니다. 내가 세운 뜻은 사회의 모순을 헤치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노동운동이 이러한 뜻을 이루는데 있어 적자이기에 현재까지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항상 동지들을 기억하고 어려울 때 그 동지들이 어떻게 판단했을까를 항상 생각합니다.
• 리더십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끊임없는 학습입니다. 학습은 사람들 내에 있습니다. 항상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할 것을 찾고 실천한다면 괜찮은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단 그 만남과 대화는 목적의식적으로 항상 준비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