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오후 1시경 서울 강남구 삼성동 소재 한국전력 앞에는 상복을 입은 20여명의 노동자들이 정해진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연좌했다. 6월 19일 초여름 날씨에 반팔을 입고 파업투쟁을 결의하며 팔뚝질을 하던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 파업대오들은 은행잎 날리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고 정해진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어야 했다.

전국 건설노동자들, “서울로! 서울로!”

‘근로기준법을 준수(주 44시간 노동)하라’며 산화하신 비정규 건설노동자 정해진 열사의 피맺힌 한을 풀기위해 전국 건설노동자들은 서울로 몰려들었다. 집회는 2시부터 시작되지만 이미 1시 30분경부터 전국 방방곡곡의 건설노동자들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한국전력공사 본사 앞쪽에 집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투쟁대오가 급격히 불어나 4차선 중 2차선도로까지 집회장소를 넓혔다. 수백개의 깃발들이 강남벌에서 휘날렸다.
대오 주변에는 사복 경찰들이 무전기를 손에들고 현장상황을 보고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부 사복조 경찰들은 현장에까지 들어와있다가 주최측 경고를 받고 퇴각했다. 경찰은 18개 중대, 1800여명이 한국전력 본사에 배치했고 서울시경기동단장이 현장 지휘를 맡았다.
이날 집회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한국진보연대를 포함한 ‘비정규직 건설노동자 故 정해진열사 공동대책위원회’가 주최한 것으로 민주노총은 지난 2일 긴급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통해 공동대책위를 꾸릴 것을 결정한 바 있다.

“정해진 열사 살려내고 유해성 구속하라”

오후 2시 30분, ‘열사정신 계승! 유해성 구속! 불법하도급 철폐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시작했다. 민중의례를 마치고 투쟁대오들은 일제히 정해진 열사의 마지막 절규를 구호로 외쳤다. “파업투쟁 정당하다, 유해성을 구속하라!”
이날 대회에서는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대회사 시작으로 전국건설노조 백석근 위원장의 투쟁경과보고를와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 연대사, 진보연대 격려사가 이어졌다. 또 박준 동지가 정해진 열사 추모가를 불렀으며 전국건설산업염맹 남궁현 위원장 투쟁사와 함께 김형근 전국서비스연맹 위원장, 석원희 전국건설노동조합 인천건설지부 전기분과장 투쟁사 등이 계속됐다. 마지막으로 인천 전기분과 조합원이 투쟁결의문을 낭독했다.

“한전은 사죄하라”

한편 집회가 열린 6일 한국전력공사는 보도자료를 내 “정해진 열사 분신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다”고 밝혔다. 또 “법적으로 단체교섭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개입할 수 없다”며 “정부로부터 전기공사업 면허를 취득하고 적법하게 계약을 체결한 전업사들을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기간 내에 퇴출시킬 권한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어 한전은 “불법하도급이나 안전관리를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전이 불법하도급이라고 적발한 건수는 2005년 2건, 2006년 5건, 2007년 9월 현재 1건 등 3년 동안 8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장에는 다단계하도급이 만연돼 있다! 전기전문업체 다수가 자격증을 대여하거나 실제로 공사현장에 나가지 않는 사무직에게 자격증을 따게 해서 형식적인 조건만 갖춘 후 입찰에 응하고 있다. 또 안전규정이 있다지만 과도하게 주어지는 일거리를 해가지기 전에 끝내려면 장비들을 온전하게 갖추기 힘들다. 건설현장 만악의 근원, 불법다단계하도급의 폐단은 궁극적으로 원청에 있다. 배전업체들은 한국전력으로부터 일을 받는다. 한국전력이 산업안전검사를 제대로 했다면 전기원 노동자들은 안전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력이 배전업체들을 제대로 관리했다면 영진전업 유해성 같은 자가 정당한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을 훼방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전력이 관리, 감독만 제대로 했다면 정해진 열사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강남 테헤란로 진격

오후 4시경 본대회를 마친 7천여명의 대오는 한국전력 본사를 중심에 놓고 진격투쟁에 나섰다. 투쟁대오들은 “정해진 열사 죽음으로 내몬 한국전력은 각오하라” 등 구호를 외치며 한국전력 건물을 에워쌌고 테헤란로로 행진했다. 거리는 건설노동자들의 분노로 뒤덮혔다. 4시 45분, 중무장한 경찰병력이 테헤란로 네거리쪽으로 튀어나와 행진을 막아 충돌이 빚어졌다. 2대의 살수차가 투쟁대오를 향해 물을 내뿜었다. 이 과정에서 2명의 조합원이 연행됐으며 1명은 다쳐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투쟁중인던 건설대오들이 물에 젖었다. “정해진 열사를 죽게 만든 책임자를 처벌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캐드도 젖었다. 그러나 우리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강남역 네거리 진출, 대시민 선전전

진격투쟁을 벌이던 삼성역 쪽의 투쟁대오들이 일제히 지하철을 이용해 강남역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투쟁대오들과 함께 이동하던 전경들을 막아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오후 5시 35분경 강남역 네거리를 점거했다. 투쟁대오들은 “정해진을 살려내라, 유해성을 구속하라, 불법하도급 철폐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에게 정해진 열사와 파업투쟁의 정당성을 알려냈다. 2만2천9백볼트 특고압 전선을 다루며 20년간 전봇대를 오르내렸던 한 건설노동자의 피맺힌 절규를 언론들은 외면했다. 70년대 노동환경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에 놓인 건설노동자들은 외롭게 투쟁해야 했다. 언론들의 침묵 속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과 죽음의 이유를 알려내려는 산 자들의 함성이 강남역 네거리를 흔들었다.
이후 파업대오들은 잠실종합운동장으로 이동, 열사투쟁의 결의를 한껏 높이며 해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