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근 형에게
- 노동자 후배 송경동 드림

형
인생은 쓸쓸한 거 아니에요
혼자 먹는 라면밥 같은 것
그것도 집 앞 슈퍼에서
외상으로 사다 먹은
그 눈물밥

일 없어 여기 저기 배회하다
뒤적이는 수첩
모두가 벼랑 끝인 삶들
천원짜리 한 장 꿀 데 없어
늦은 밤 하염없이 걸어오는
그 서글픔 같은 것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맞아 죽었다는 것
아팠지만, 미련도 없는 인생
살아서 오히려 죽음이던 세월
사랑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사랑하지 못하고 간다는 미련도
아픔도
검은 아스팔트 위에
검은 핏덩이로 굳어
빗물에 씻겼나
새벽녘 청소차 물줄기에 씻겼나
우리가 안 보는 새
이런저런 삶의 쓰레기들과 함께
저 바다로 쓸려 내려가며
형 그래도 괜찮았죠

형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것 아닌가요
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
어차피 통하지 않을 이야기들
다 저 형산강 다리 아래 흐르는 물들에게 주고
우리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니겠어요
하수구로 하수구로 흘러
다시 새벽길에 깨어나
안전화 줄 질끈 묶고
작업복 가방 들쳐 메고
차디찬 거리에서
오들오들 떨며
또 새벽 첫차 기다리는 일

형
나 옛날에
내복 세 벌을 껴입고도 추웠던 적 있어요
자꾸 허리가 쓸려 올라가면
너무 허리가 시려
아무나 죽이고 싶고 나도 죽고 싶었어요
LPG통 산소통이 남다르게 보이고
고압선이라도 만져버리고 싶었어요
함바에 누워 식권이나 쓰며 사흘을 앓고 누웠는데
반장이 찾아 왔어요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라고.
일 안해도 되는 생쥐라도 되어 숨고 싶더군요
돈을 준다 해도 일하기 싫은 날이 많았어요

형
나도 옛날에
용접불꽃에 눈 데여 종일토록 울고 다닌 적 있어요
작은 빛 하나에도 눈물이 주루룩 흐르잖아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람들이 그리워 쫓아다니는
밝고 깨끗한 태양 아래
작은 빛 하나도 두려워지는
내 모습이 서러워
나중엔 정말 눈물났어요

형
그렇더라고요
전에는 위대하던 것들도
나이 먹으면 다 낡아져 가고
어제의 동지들도
다 헤어져서 가요
내일 모레 곧 올 것만 같던 새로운 세상도
노동자 총궐기도
늘 꿈일 뿐
우리는 그런 것이 오고도
나중에 나중에야 해방될 인간들

그래요. 형
우리는 삶의 보수주의자들이었어요
모두가 자기 삶이 있다고 믿고 존중했어요
단 한 사람도 함부로 자신을 변화시키지 말기를 바랐어요
단 한 사람도 함부로 행복해지지 말기를 바랐어요
단 한 사람도 나보다 더 행복해지지 말기를 바랐어요
제발 그만 일 시키고 쉬게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발 조금만 일하고도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렸어요

형
그곳에도 자장면 팔아요
자장면 먹고 싶지 않아요
신 김치에 라면
상추에 밥 싸서 된장 잔뜩 넣어 우걱우걱 먹고 싶지 않아요
천장 없는 작업장
급하면 아무데서나 내려야 했던 바지춤
하얀 달과 속삭이며 누던
그 노랗고 튼실한 똥 한번 시원하게 눠보고 싶지 않으세요
잔업철야 쇳가루를 씻어주던
지글지글 삼겹에 소주 한잔, 크으
그래요 우리는 생각을 먹고 살기에는
늘 너무 배가 고팠죠

형
형은 그래도 잘 됐어요
걱정 말아요
열사 그런 것 되지 않았어요
형 죽음은 개죽음이라고
쟤들이 다 정리 했어요
쟤들 바빠서 형한테 관심 없어요

우리 쪽 사람들도 다 정리 했어요
바빠서 형 일 챙길 틈 없어요
교섭 해야죠 또 싸워야죠 선거 해야죠
표 계산 해야죠 가족 챙겨야죠 정신없어요
형은 그냥 재수 없어 죽은 걸로 해요
그게 형 마음도 편하고
두루 두루 편한 일이에요
옛날 선배열사들도 다 그랬어요

형
나도 바빠서 그만 가봐야 해요
인연 있으면 내년에 또 봐요
쓸쓸한 이 시대에는 우리 너무 자주 만나지 말아요
내년엔 형 얼굴도 좀 편해졌으면 좋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형, 추신 하나
작년에 형 때문에 출두요구서 다섯 번 받았어요
저 새끼들이 끝까지 출두하라고
다 왔다 갔다고
출두하면 없던 일로 봐주겠다고 하는데도
난 안 갔어요
형이 의문사로 죽어도 그만인 인생으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앞으로도 죽어도 가지 않을 거예요
잘했죠. 형
그래도 잘했죠. 형. 형.